종교개혁과정에서 미술의 역할과 기능의 엇물림에 대하여

 

 

최 광열 나비통신 편집주간

 

자유혼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기 전에도 진리를 왜곡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며 부패한 교권에 반기를 든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이들이 개혁의 샛별로 불리어지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1384)와 보헤미아 프라하대학의 얀 후스(Jan Hus, 1372~1415), 그리고 피렌체의 지로라모 사모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1452~1498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이들을 이단자로 몰아 핍박하였습니다. 후스는 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공의회 Council of Konstanz, 1414~1418로부터 화형을 당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거위 한 마리를 불사르지만 100년 후에는 당신들이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예언을 귀담아 들었어야했습니다. 불과 100년이 지난 후에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와 장 칼뱅 Jean Calvin, 1509~1564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을 그들은 막지 못했습니다. 지성인들과 민중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클리프와 후스의 개혁은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후에 등장한 개혁운동을 로마가톨릭교회는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왜 로마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을 막지 못했을까요?

종교개혁 성공의 일등공신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진리 왜곡과 부패입니다. 교황의 부패와 타락은 끝이 없었습니다. 무신론자로 의심받는 자가 교황의 위에 오르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면벌부’라는 기상천외한 종교상품이 등장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건재하다면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지옥의 붕괴와 그 부흥’에서 말 한대로 ‘교회는 악마의 발명품’임에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교황의 절대권이 강화되면서 교황을 견제할 공의회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세속 왕권의 신장, 인쇄술의 발달 등 종교개혁을 막기에 로마가톨릭교회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재발견과 합리적인 사유의 길을 열어준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의 토양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100년 전에 비하여 시대가 변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이 날에 영웅으로서의 루터를 상기하기 보다는 시대를 잘 만난 행운아로 그를 인식하는 겸손한 태도가 루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루터는 처음부터 당시 교회와 결별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는 없었기에 유화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아울러 암울한 시대에 개혁의 나팔소리를 내었던 실패한 개혁자들이야말로 존경받아야할 위인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유혼을 지닌 자들로서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진리 따르미로서 삶에 충실했습니다. 오늘 500년 전 종교개혁일을 기념하는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합니다.

 

미술, 로마가톨릭교회의 반격 도구가 되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 일부, 그리고 영국에서 들불처럼 번지는 프로테스탄트 열풍을 가만히 구경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트리엔트공의회 Council of Trient, 1545~1563 를 통하여 종교개혁에 대한 기존 교회의 입장을 천명하였습니다. 종교개혁으로 인한 혼란을 극복하고 내부 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 가 결성한 예수회 Societas Jesu 가 그 첨병에 서서 교회 회복을 견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고 로마가톨릭교회는 더 이상 보편적 Catholic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교황 식스투스 5세 Sixtus Ⅴ, 1520~1590 는 가톨릭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트리엔트공의회 이후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은 두 가지 방면으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선교였습니다. 유럽에서 잃은 땅을 해외에서 회복하려고 여러 수도회가 앞 다투어 선교기지를 개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안에서 잃은 것을 밖에서 찾자’는 것입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에서 매우 공격적인 선교가 시행되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실추된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당을 더 아름답게 건축하고 멋지게 장식하여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로마가톨릭교회는 미술의 강력한 힘을 불러냈습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 미술만큼 강한 무기는 없었습니다. 더 높게, 더 밝게, 더 화려하게, 더 아름답게 세워진 성당은 ‘지상에 재현된 하늘’로서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 바로 마데르노에 의해 건축된 성 베드로성당 정면과 베르니니가 조성한 그 앞의 타원형 광장입니다. 이렇게 꽃피워진 예술운동을 예술사에서는 바로크미술이라고 하는데, 바로크미술은 제2의 르네상스와 비견되는 예술사조로서 르네상스가 권력자 중심의 지적인 예술운동이었다면 바로크는 로마를 아름답게 장식하므로 교회를 회복하려는 종교적인 목적과 중산시민이 중심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이미지를 거부하다

프로테스탄트는 이미지 숭배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슬람국가’나 ‘탈레반’이 행하는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 등의 고대유적을 마구 파괴하는 반달리즘 Vandalism 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루터파는 이미지 거부와 관련하여 칼 슈타트 같은 급진적 입장을 가진 자도 있었지만 비교적 온건하였습니다. 이미지거부운동은 특히 칼뱅파가 많았던 네덜란드에서 활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에스파냐의 펠리프 2세에 대한 반감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즉 성상파괴 행동에는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의도와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저항, 그리고 네덜란드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에스파냐에 대한 사회, 정치, 경제적 불만이 섞여있었던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는 조형예술을 보는 관점이 로마가톨릭교회과 비교하여 몰상식해보입니다. 그래서 흔히 종교개혁자들의 예술에 대한 낮은 이해가 예술의 퇴보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만 종교개혁을 통하여 미술은 미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교회라는 권력에 의해 빼앗겼던 예술의 순수를 되찾은 사건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종교개혁이 있었기에 예술은 우리 삶 가까이 올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그리스 남동부의 밀로스 섬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에 의해서 발견되었습니다. 마침 이 섬에 정박하여있던 프랑스 해군이 이를 입수하여 프랑스 왕 루이18세에게 헌납하여 지금은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벌거벗은 몸이 미술의 주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오래된 인체조각으로서 BC 25,000~BC 30,0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로부터 고졸하고 소박한 인체미를 표현한 BC 7~6세기를 전후한 아르카익 Archaic 을 거쳐 균형과 조화와 비례를 지향하는 그리스·로마미술에 이르도록 인체는 미술의 좋은 소재였습니다. <창을 든 남자>와 <밀로의 비너스> 등은 인체의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리스·로마시대의 대표 작품들입니다. 미술은 그 출발시점부터 인체를 표현하여 인간을 칭송하였습니다. 그것은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Juvenalis 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건강한 인체는 건강한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건강한 신체를 갖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였습니다. 다양한 육상경기가 일반화되었고 도시마다 운동경기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승리한 사람은 예술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중세에 이르면서 인체, 특히 여성의 몸은 더 이상 미술의 소재가 되기 어려웠습니다. 박해받던 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미술은 종교의 시선으로만 세계를 조망해야 했습니다. 종교가 가르친 인간관은 어둡고 침울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겉은 우아하고 고상하게 꾸몄더라도 인간의 본질은 죄로 인하여 회복불능상태로 망가져있다는 것입니다. 미술은 종교의 눈으로만 작품의 소재를 찾아야 했고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작품을 묘사하므로 교화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예술을 창조하는 화가는 단순한 장인에 불과하였습니다. 자기 작품에 자기 사인을 남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미술이 해방되다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4세기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서 인체는 다시 미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4~1510)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가 시스티나성당에 그린 프레스코화 <천지창조>와 조각 <다비드> 등 다시 인간의 벌거벗은 몸이 등장합니다. 전 같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미술을 지배하는 종교의 힘이 약화된 탓도 있지만 인간을 새롭게 보려는 정신이 되살아난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미술의 주체인 화가가 단순한 장인으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 신적 창조행위를 하는 위대한 존재라는 자각도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술가의 손에서 창조되는 인체는 신화와 종교의 이야기에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통하여 미술은 비로소 해방되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강요한 구속받기 전의 ‘어두운 인간관’에서 타락이전, 또는 구속이후의 ‘밝고 회복된 인간관’ 표현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중세 천년 동안 권력화 된 교회의 오류에 대한 반발로서의 종교개혁은 이미지 거부운동으로 흘렀습니다. 지나치게 화려하게 치장한 예배당과 이교화 된 이미지숭배는 종교개혁자들에게 거부의 대상이 되어 결국 성상파괴로 이어졌습니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에스파냐로부터 압제받던 네덜란드는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이미지 거부가 더욱 강력하게 전개되어 일종의 반달리즘 성격도 띄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흰색의 벽을 이상적인 건축미로 생각한 현대건축의 거장 프랑스의 르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1965 의 생각을 수용한다면 온갖 장식이 제거된 예배당 회반죽의 흰색 벽이야말로 가난한 자와 부자 모두가 공평해질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입니다. 20세기 건축의 흐름을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앞서 예견한 것일까요? 아무튼 이미지로 가득 찼던 예배당은 탈이미지로 소박해졌습니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의 힘이 여전한 곳에서 미술은 종교의 장식에 충실하였고 종교개혁의 충격을 극복하기 위하여 더욱 이미지 창작에 몰두하여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지 거부운동을 벌인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미술은 쇠퇴하거나 몰락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술품의 최대수장고였던 교회가 무너진 곳에서 미술은 진정한 부활을 경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술은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일상과 자연, 평범한 사람 등 미술 본연의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렇게 창작된 작품들은 다양한 시민사회에 의해 소비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림은 도시의 곳곳에 걸렸습니다. 시청사에도, 시민들에 의한 경비대의 간부들이 모이는 건물에도, 고아원은 물론이고 상점과 사무실에도, 또한 상류사회의 사교를 위한 접견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일반 시민들의 응접실에도 그림은 걸렸습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장소에서 그림을 볼 수 있었지만, 단 한 곳, 교회에서만큼은 그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양정윤, ‘성상파괴운동과 미술의 다양성’, 2014. 5. 29 세계일보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 Johan Huizinga, 1872~1945 의 말입니다. 예배당에서 그림은 사라졌지만 세상은 그림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이 가져온 놀라운 변화입니다. 미술은 바로크와 로코코시대를 지나 로마·그리스미술시대를 그리워하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를 거쳐 현대에 이르면서 미술은 더 이상 종교의 수단이 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은 미술을 해방시켰습니다.

 

누드화가 등장하다

19세기 에스파냐 마드리드에는 귀족흉내 내기를 즐겨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마호 majo, 여자는 마하 maja 라고 하였습니다. 고야 Francisco de Goyam 1746~1828 가 <옷을 벗은 마하>를 그렸습니다. 하얀 침대 위에 벗은 몸으로 두 손을 머리에 올리고 정면을 응시하며 미소 짓는 마하의 시선이 강렬하고 관능적입니다. 이 그림은 당대 최고 권력자 고도이 Manuel de Godoy, 1767~1851 의 주문으로 그렸지만 그가 실각하자 이 그림이 세상에 알려져 충격을 주었습니다. 고야는 누드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1815년에 종교재판에 회부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에스파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종교적 전통이 매우 강한 나라입니다. 왕실은 종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유대인과 무어인, 프로테스탄트를 가혹하게 탄압하였습니다. 특히 1478년에 등장한 종교재판소는 악명 높았습니다. 죄를 밝히는 과정은 끔찍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어떤 고문도 가능했습니다. 진정한 신자는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어떠한 고문도 견딘다고 했습니다. 고문 과정에서 죽으면 마녀와 이단자이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했고, 고문을 이기지 못해 거짓자백을 하면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래저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종교적 순수성이 지켜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사회는 불신으로 경직되었고 자유로운 토론이 막혀 학문은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제도적 민주주의의 정착도 더뎠습니다.

에스파냐의 미술사에서 여인의 벗은 몸은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 1599~1660 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가 유일하던 때였습니다. 그나마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의 총애를 받는 궁중화가였고, 그려진 비너스는 뒷모습이었으며 모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큐피드가 든 거울에 희미하게 묘사했습니다. 종교적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세상이 요동칠 것을 알면서 고야는 왜 이런 위험한 그림을 그렸을까요? 고야는 이 그림 외에는 누드화를 더 그리지 않았습니다. <옷을 벗은 마하>를 통해 고야가 시대와 사회에 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재미있는 것은 고야의 이 그림이 한국 법정에서 유죄판정을 받아 화형에 처해졌다는 점입니다. 1970년 한 성냥갑에 이 그림이 인쇄되어 음란물 시비가 벌어졌는데 대법원은 이를 모두 몰수하여 불태울 것을 판결했습니다(대법원 1970. 10. 30 701879판결). 하지만 정작 1815년 고야의 종교재판에서 이 그림은 화형을 면하고 캄캄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는데 이는 권력을 가진 특별한 남성들만 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였습니다. 불태워지지 않은 것만으로 위로삼아야 할까요? 그러나 고야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그림을 공개하라는 여론이 빗발쳤고 그림을 본 사람은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 이 그림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1901년 이 작품은 프라도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이명옥, SENSATION2007, 웅진지식하우스, 125쪽 참조).

 

미술에 깃든 자유혼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1770~1831)은 역사의 발전을 ‘자유의 증대과정’으로 보았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역사에 일정한 방향이 있다고 합니다. 정치적 억압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부조화, 그리고 사상의 자유를 넓히는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민적 자유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경제적 평등과 사회적 조화 역시 지난한 과정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또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지성인들이 굴욕을 감내했고 희생되었던가요! 자유의 획득은 참으로 어려운 길입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이 힘으로 누르고 온갖 벽이 가로막지만 도도한 자유의 강줄기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미술에 담긴 역사 이야기도 이와 통합니다.

미켈란젤로는 1541년 11월 1일에 ‘최후의 심판’을 공개하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종교의 그늘에 가려진 미술에만 익숙한 자들로서는 수염을 제거하므로 권위보다는 패기 넘치는 예수와 후광이 없는 성자들, 날개 없는 천사와 391명의 나체의 군상에 대하여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동시대에 격렬하게 불고 있는 개혁의 바람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는 개혁 가치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작품을 표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루터가 95개조항의 항의문을 붙인 지 24년 되는 날 로마가톨릭교회의 심장인 시스티나성당에 이런 작품이 등장했다는 것은 시사 하는바가 큽니다. 더구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심판의 의도로 클레멘스 7세의 명에 의해 제작된 작품이 도리어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류와 한계를 그렸다는 것은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야는 종교재판소가 정한 금기에 대담하게 도전했습니다. 그의 창작활동은 가부장의 경직된 사고에 익숙한 시대를 향한 돌팔매였고 부패한 교회에 대한 도전장이었습니다. 화가로서 작품 활동이 위축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생명을 위협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자유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클리프나 후스, 또는 사상의 자유를 굽히지 않다 화형당한 브루노 Bruno, Giordano, 1548~1600 에게 있던 자유혼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은 아름답다?

인간은 아름다운 존재가 아니라 태생부터 죄로 얼룩진 존재이며 탐욕과 교만으로 얼룩진 악의 덩어리라고 가르쳐온 종교의 교리가 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수려한 외모를 갖추고 아무리 경건하게 꾸미더라도 그 속도 아름답다고 단정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 실상입니다. 종교적 수행과 도덕적 성찰을 통해서 어느 정도 거룩해질 수는 있지만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악은 한순간에 인간을 무너뜨리고 맙니다.

아나톨 프랑스 Anatole France, 1844~1924 의 소설 『타이스』는 인간의 양면성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존경받는 은둔수도사 파프뉘스가 알렉산드리아의 화류계 여성 타이스의 구도를 결심하고 그녀를 찾아갑니다. 아름다운 몸과 탁월한 사교술로 주류사회 남성들의 이목을 받으며 살아온 타이스는 파프뉘스의 설복에 감동을 받고 자신이 쌓은 세속적 부귀를 한 순간에 버리고 종교적 가르침에 귀의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타이스가 거룩해지는 모습을 보는 파프뉘스는 정작 정염에 불타올라 추한 몰골로 변해갑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오죽하면 바울 같은 사도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마서 7:24고 인간의 한계성 앞에서 절규하였을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인간을 아름답게 보는 시선이 비난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설사 희대의 죄인으로 낙인찍혔더라도 인간 생명이 유지되는 한 개선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악마적입니다. 그것은 종교적 가르침에도 위배됩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이사야 42:3 분이 아니시던가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이 아름답다는 근거입니다. 인간 서로에게 잠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내고 서로를 인정하며 살 때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미술은 눈의 예술이 아니라 머리의 예술입니다. 그래서 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 옳습니다. 미술 작품을 대하면서 겸하여 작가의 사상과 시대정신, 그리고 그 시대의 미학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인간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미학적 추구는 종교의 본질과도 통합니다. 아름다움과 거룩은 다르지 않습니다.

 

4852@daum.net

 
Posted by 구인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