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신채호와 춘원 이광수. 그들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삶의 결은 달랐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극복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장군이다. 일본에 의해 나라가 유린당할 때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한 소설이 두 신문을 통해 발표되었다. 하나는 단재 신채호가 1908년 6월 11일부터 10월 2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했던 〈조선 제1위인 이순신 전〉이고, 또 하나는 춘원 이광수가 1931년 6월 26일부터 1932년 4월 3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이순신〉이다. 그런데 신채호의 글은 일제에 의해 판금 조처가 되었고, 이광수가 쓴 〈이순신〉은 일제 치하에서도 연재되었다. 문제는 이광수의 〈이순신〉이 어떻게 일본식 변성명과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하며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연재될 수 있었을까?

신채호의 ‘이순신’은 이순신의 인품과 지혜를 밝히면서 힘을 합해 싸운 장졸과 백성을 모두 소중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이광수의 ‘이순신’은 ‘이순신’만 미화하였을 뿐 당시 관료들과 백성들을 형편없게 표현하였다. 이광수에 의하면 임금은 귀가 얇고 우유부단하며, 심지가 굳지 못한 덜떨어진 군주이며, 신하들과 관리들은 매일 당쟁만 일삼고 소일하며 제 배만 부르면 만사태평인 전형적인 탐관오리이며 백성들은 무지렁이에 불과하였다. 오직 조선에 용감한 장수, 부하들의 지지를 받는 장군은 이순신뿐이었다. 게다가 일본 장수들은 한결같이 민첩하고 용감하게 그리고 있다.

 

파주 목사 허진은 왕에게 저녁밥 못드린 죄를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상감이 잡숫기도 전에 먼저 다 먹어버린 호위 군사들은 먹고 나서야 죄 지은 줄을 알고 에라 빌어먹을 것 따라가면 별 수가 있느냐, 경칠 것밖에 남은 것이 있느냐 하고 밤 동안에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이순신』, 우신사, 137면)

 

“잘들 호강했지. 저희들이 우리 위해 한 일이 무에야? 저희들이 생전에 누구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해 보았던가? (중략) 백성들의 등을 긁고 나라를 망해 놓은 것밖에 한 일이 무에냐 말야. 무슨 낯에 누구더라 오라 가라…”(137면)

 

한 사람도 능히 적병과 겨눈 사람이 없었다. 진실로 못난 백성이었다.(188면)

 

“팔도강산에 살아있는 이, 순신 하나뿐이었다. 강산이 오직 그 하나를 믿은 것이다. (중략) 전국의 힘이 다 무너지고 왕과 그의 신하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여 오직 다른 나라(명나라)에 백배 천배로 구원을 애걸하고 있을 때에 아랫녘 한 구석의 미관말직을 가진 일개 수사 이순신이 홀로 삼천리 조국을 두 어깨에 메고 조정에서는 알아주지도 않는 싸움의 길을 떠나는 것이다.”(189면)

 

이광수는 이순신의 아들 면이 일본군의 대장과 직면한 장면도 소개하는데 여기에서 일본군 대장은 적이기도 한 면을 배려하는 매우 상식적이고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너의 가족을 죽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대장이 보호하라기에 오는 것이다. 만일 더 저항하면 너도 죽여 버리고 네 가족도 죽이려니와 네가 항복만 하면 너도 살리고 네 가족도 해치지 아니하고 데려다가 편안히 살게 할 것이다.”(357면)

 

“네가 갑옷 투구를 아니 입었으니 나도 갑옷과 투구를 벗을 테다.”(358면)

 

일제는 ‘영웅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일제는 단재의 ‘이순신’은 죽이고 춘원의 ‘이순신’은 살린 것이다. 생각 없이 이광수의 〈이순신〉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조선민족에 대한 열등감과 일본에 대한 경외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순신을 이광수식으로 읽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기회만 생기면 일본 찬양에 목소리를 돋우고 우리 스스로는 깍아 내린다. 답답하고 슬픈 일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독립운동가를 밀고해야만 매국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자긍심이 없으면 누구나 매국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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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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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구인중 :